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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도 포로수용소

★러블ㄹ1정숙★ 2011. 6. 8. 10:49

거제도포로수용소(Geoje POW Camp)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당시 사로잡은 북한군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던

거제도1951년부터 (현 거제시) 고현리, 수월리 등지를 중심으로 설치한 수용소이다.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시설과 규모

거제포로수용소 입구

1950년 11월 27일 유엔군에 의해 거제시 옛 신현읍, 연초면, 남부군 일대의 1,200헥타르 규모의 수용소가 설치되었고, 1951년 2월부터 포로수용소 업무가 시작되었다. 포로수용소는 60, 70, 80, 90 단위의 숫자가 붙은 구역으로 나뉘었고, 1개의 단위구역(enclose)에는 6,000명을 수용하였다. 각 구역의 하부 구조로 수용동(compound)이 있었고, 전체 수용소는 4개의 구역과 28개의 수용동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중앙 계곡에는 제6구역, 동부 계곡에는 제 7, 8, 9 구역이 설치되었다. 또한 이러한 시설과 규모를 자체 지원할 수 있는 비행장, 항구, 보급창, 발전선박, 병원, 도로, 탐조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편집] 포로수용

디오라마관 - 포로의 노역

1951년 6월까지 북한 인민군 포로 15만과 중공군 포로 2만명 등 최대 17만 3천명의 포로를 수용하였고, 그 중에는 여자포로도 300명이 있었다. 그러나 강제징집 등의 이유로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와 송환을 원하는 친공포로 간에 유혈사태가 자주 발생하였고, 1952년 5월 7일에는 당시 수용소 소장이었던 도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냉전시대 이념갈등의 축소판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

[편집] 상병 포로의 교환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만 1년만에 휴전회담이 시작되었고, 이 때 포로 교환 문제가 논의되었다. 북한은 포로 전원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으며, 포로 교환의 방식이 서로 달라 입장차를 좁히지 못하였다. 1953년 2월에 부상당한 포로를 우선 교환하자는 유엔 측의 제안에 북한이 수용을 함으로써 《상병포로 교환에 관한 협정》에 북한, 중공, 유엔이 합의를 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4월 20일 부터 5월 3일까지 전쟁 발발 이후 처음으로 쌍방 간에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이때 교환된 포로의 숫자는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이 684명, 북한과 중공군을 포함한 북한 측이 6,670명이었다.[1]

[편집] 반공포로의 석방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의 일방적인 석방으로 27,389명이 탈출하였고, 친공 포로의 소환과 등 존재의 이유가 없어져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으로 인해 폐쇄되었다.

현재는 잔존건물 일부만 남아서 이곳에 당시 포로들의 생활 상이나 모습, 의복, 무기 등을 전시해 놓고 있으며, 최근 기존의 시설을 확장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여 전쟁의 역사와 산 교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2]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은 1983년 12월 20일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고, 야외 캠프와 일부 유적터만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확장하여 1999년 유적관을 1차로 개관하였고, 2002년 11월 30일 유적공원을 준공하여 2차로 개관하였으며, 2005년 5월 27일에는 흥남철수작년 기념 조형물을 준공하여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탈바꿈하였다.[3]

[편집] 폭동 사건

거제도 폭동 사건, 디오라마관

1952년 5월 7일 발생한 거제도 포로수용소 폭동사건은 1952년 5월 7일부터 거제도 제76포로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던 공산포로들이 일으킨 일련의 소요사건으로 6월 10일 무력으로 진압되면서 끝났다.

한국전쟁 당시 거제도에는 13만 2천명을 수용한 국제연합군측 최대 규모의 포로수용소가 있었다. 이들은 반공(反共)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누어 대립하였는데, 분열의 원인은 1949년 제네바 협정에 따른 포로 자동송환이 아닌 자유송환을 국제연합군측이 주장하면서부터였다.

5월 7일 제76포로수용소의 공산포로들은 수용소장인 미국 육군 F.T.도드 준장을 납치하고, 그 석방 조건으로 포로들에 대한 처우 개선, 자유 의사에 의한 포로 송환 방침 철회, 포로의 심사 중지, 포로의 대표위원단 인정 등을 제시하였다. 이 폭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국 1 기병사단에 항복했던 이학구가 주도했다. 이들은 미군의 심사를 거부하고 대립하다 미군이 발포하자 70여 명이 죽고 140여 명이 부상당하였다. 미군과 반공포로, 공산포로들이 맞부딪힌 가운데 난동 포로 50여 명이 살해되었다.

공산포로들은 그들에 대한 고문·폭행·학대 등을 거부하며 평양으로부터의 지시에 따라 그해 6월 20일을 기하여 전 포로수용소에서 일제히 봉기하여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리지웨이의 뒤를 이어 새로 국제연합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마크 클라크 대장은 이와 같은 사건을 막기 위하여 포로의 분산 수용을 결정하고 H. L. 보트너 준장을 포로수용소장으로 임명하였다. 6월 7∼10일에 부산 포로수용소에서 공산포로들이 경비병에 반항하다가 1명이 피살된 사건을 계기로 재차 폭등을 일으켰다. 보트너는 1952년 6월 10일부터 포로를 분산 수용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105명의 반공포로들이 공산포로들에 의하여 살해된 사실이 드러났으며, 6월 10일 도드 소장은 무사히 구출되었다.

 

<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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