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아이와 덕수궁에 다녀왔답니다
때마침 수문장 교대식이 있어 구경하고..
대한문을 들어서니
고운 단풍들이 반겨줍니다
덕수궁 뒷쪽엔 아름다운 단풍길이 있네요
하루일과를 끝내고 돌아가는
수문을 지키던 사람들...
덕수궁 돌담길이랍니다
한바퀴 돌아봐야 하는데
아들녀석 힘들다 하네요..
아쉽지만 입구에서 잠깐 구경만하고 왔어요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궁궐인데도
소박한게 여염집같다
한창 복원중이긴 한데..
뭐든지 간결하고 소박한게 또 다른 매력을 안겨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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